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 탈환작전 (문단 편집) == 여담 == * 일단 대외적으로는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멋대로 침범해 중대 하나를 먼저 보낸''' 7사단보단 유엔군 전투지경선을 지키며 사단 전체가 평양으로 진주한 1사단을 평양선봉입성 부대로 인정하고 있으나 누가 먼저 입성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국군 1사단 소속 연대들, 7사단, 전사(戰史) 관계자 사이에서 입성 시간대, 점령 및 게양한 위치, 정통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이 이견은 지금도 분분해 [[2010년]] [[대한민국 국방부]]도 인정할 정도이며, [[정일권]] 당시 참모총장은 [[1985년]] 이를 공동 입성이라고 증언했다.[[https://www.nocutnews.co.kr/news/4289253|#]][* 이와 비슷한 사례로 원산최초 입성문제가 있는데, [[수도기계화보병사단]]과 [[제3보병사단]]이 이를 두고 쌍방 신경전을 벌이자 김백일 1군단장이 이종찬 장군과 송요찬 장군을 불러 공동입성으로 합의를 봤다고 한다.--군단장이 까라는데 별 수가 있나.--] * [[백선엽]] 장군도 전후 7사단의 뒷사정을 알고 '무모하고 위험했으나 뭐라 탓할 수는 없으며, 쌍방 교전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고 술회했다.[[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06/2015020603150.html|#]] * 한국군 7사단과 함께 평양 쪽으로 방향을 튼 8사단은 19일 성천을, 20일엔 강동을 점령했으나 이때는 이미 평양이 점령된 이후라 덕천 방향으로 향했다. * 한국군 7사단 5연대는 이 당시 2군단 직속 예비대로 배속돼 8, 3연대를 따라 평양에 들어가지 않았다. *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하던 바로 그 날, [[북한-중국 국경]]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30만 명에 달하는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었고, [[11월]] 초 7사단은 이들을 상대로 [[개천-비호산 전투]]를 치른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평양 전투, version=129, paragraph=6.1)][[분류:6.25 전쟁/전투]][[분류:지상전]][[분류:백선엽]] [include(틀:포크됨2, title=평양 탈환작전, d=2023-02-20 19:19:4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